들어가며
낮은 길어지고, 날씨가 꽤 더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밤공기는 상쾌하여 자주 밤산책을 즐기곤 합니다. 강가를 따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꼭 학창 시절이 떠오르곤 합니다. 독서실에서 혼자만의 고민에 갇혀 1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헛돌고 있을 때, 잠깐 바람을 쐬고 오자고 날 부르는 친구들의 손짓, 저마다의 고민을 내려놓는 친구들, 시내의 불빛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 하늘을 수놓는 별들 그리고 풀벌레 소리. 그렇게 시답잖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버텼던 기억이 나곤 합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고등학생의 시절은 막이 내리고 법령에 따라 나이를 채워 어른이 되었습니다.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듯 합니다. 여전히 어른의 실마리는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최근 가장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의연함을 갖는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불합격 메일을 받아도 의기소침하지 않는 의연함. 소중한 친구와 다투었을 때 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거나 흔쾌히 용서할 수 있는 의연함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의연함 말입니다.
2024년 상반기에는 의연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어른스러워질까요? 어느 정도 나이와 어른스러움은 양의 상관관계가 있지만 필요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은 어른이라는 것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서도 내리기 어렵습니다만, 지금은 의연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어른이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 베낭을 메고 떠나 포항에서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모래먼지와 함께 휘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당신이 아득히 먼 시간 동안 견뎌왔을 파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파도에 맞서는 당신의 의연함을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요 근래 어쩌면 당신을 닮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괭이갈매기, 파도, 모래먼지 그리고 의연함.
혼자 경주로 여행을 떠나다
겨울 방학때는 거의 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이어서 다양한 공부 및 봉사로 인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와 반대로 4학년 1학기가 시작되면서 오히려 바빴던 방학 스케줄이 사라지며, 잠깐의 틈을 내 경주 여행을 혼자 다녀왔습니다.
원래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가고자 하는 생각은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만, 부산을 가려던 계획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경주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경주 보문에 조용한 숙소가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드는 여행이었습니다. 덕분에 그 숙소에 오랫동안 머물며 경주 시내를 둘러보고, 포항의 바닷가를 보고 올 수 있었습니다.
포항의 바닷가는 여전히 생생합니다.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수많은 괭이갈매기들 포근하게 얼굴을 때리는 모래 바람까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는 것 만으로도 다양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평선을 보며 마음가짐을 정리하였습니다.
데이터 마이닝 연구실에 들어가다
사실은 대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부터 석사 과정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학부 과정은 단순히 이론을 배우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과 공학자로서 논문을 작성해 보고 연구를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연구실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머신러닝 분야에서 사용하는 임베딩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곳이었습니다.
연구실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학부에서 컴퓨터 수업을 하시는 교수님과 함께 매주 미팅을 가져, 어떤 연구를 할 지 점점 굳혀나가는 것입니다. 임베딩(embedding)이라는 것은 굉장히 신기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예를 들어 사진, 문자, 동영상, 음성 등 모든 것들을 고차원의 벡터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데이터를 벡터 공간 위에 나타내게 되면 어떤 요소들이 가까운 지 혹은 멀리 있는 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나, 지하철, 사과를 임베딩으로 나타내면 바나나와 사과의 거리가 바나나와 지하철과의 거리보다 가까울 것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추천 시스템이나 검색 시스템에서 사용하는 이 임베딩이라는 것을 통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최마태의 POST IT
사실은 조금 자랑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일이지만, 저는 어떤 일을 하던 끝장을 보고자 하는 성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끝을 보는 정도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곤 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멋지다고 말하곤 합니다만, 저는 때로는 스스로 이런 만족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보며 세속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좇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끄럽곤 합니다.
운이 좋게 최마태라는 유명한 사진 작가 분의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카메라의 작동 원리부터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인물을 어떻게 찍는지, 보정은 어떻게 하는지 등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이렇게 집중해서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흥미로운 강의였습니다. 모델도 직접 사진 찍어 보기도 하고 스튜디오의 장비들도 하나씩 다 사용하곤 했습니다.
강의 막바지에 최마태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예술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술에 실패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다가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면 그것이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진짜 쉽지 않으며, 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술적인 작품을 찍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만큼 예술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간 수많은 땀과 노력들, 엄청 많은 시간을 쏟아야 그에 비슷한 실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술적인 사진을 찍기는 쉽지 않구나를 느끼며, 반대로 내가 찍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시대싱 시즌4
시대팅은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이라면 모두 알 정도로 꽤나 유명해졌습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인 이벤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원하는 파트를 하게 맡기고, 남는 파트인 사용자들을 매칭하는 알고리즘을 짰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따로 블로그 포스팅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배포가 완료되고 매칭까지 성공되었습니다. 커뮤니티에서는 뜨거운 반응들이 오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칭하는 부분을 손봤기 때문에, 매칭과 관련한 사람들의 피드백들이 오갔습니다. 이러한 이벤트를 통해서 알마나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줬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오히려 안 좋은 기억을 남겨드리지는 않았을까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세상에 많고 다양한 개발자들을 만나며 각자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는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것을 개발하는 것을 좋아하며, 누구는 엄청 견고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꿈꾸곤 합니다. 저는 이러한 이벤트를 총 네 번, 시즌 4까지 만들며 무엇을 만들고 싶은 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프로덕트를 만들고 싶습니다. 내가 만든 서비스가 많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에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언젠가 저도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훌륭한 프로덕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백준 플레티넘을 달성하다
백준 플레티넘을 달성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백준 문제 풀이를 시작한 지 약 2년 반 정도 되는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매칭 알고리즘에서 공부했던 gale-shapley라는 알고리즘 태그 문제들을 풀이했더니 순식간에 점수가 올라 solve.ac에서 플레티넘 5가 되었습니다.
오랜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 풀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학교의 졸업을 앞둔 지금 천 개가 가까운 문제들과, 플레티넘을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하루에 하나씩 풀어 곧 천 개 가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놀랐습니다.
UBAI에 합류하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빅데이터 AI연구원이라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슈퍼컴퓨터를 관리하는 일입니다. 코딩 잘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 후에 UBAI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슈퍼컴퓨터라는 자원을 서울시의 연구원들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단순히 리눅스 계정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을 넘어 HPC(High Performance Computer)를 관리하는 일입니다. 생각보다 단순한 일이지만, 어떻게 하면 이러한 HPC의 제공을 좀 더 원활히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좀 더 다양한 엔지니어링적인 고민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용자의 하드웨어 사용량을 프로파일링 할 수 있을까, 서버를 drain 시키는 사용자들이 돌리는 job은 무엇인가, module 및 가상 환경을 어떻게 제공해야 프로비저닝 하기에 용이할까? 등 다양한 도전과제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보다 깊은 프로그래밍의 세계로 착실히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대학교 4학년에 되면서 새로웠던 것들은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엔 새하얗던 옷들도 여러 번의 빨래를 거쳐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고, 즐겨 신던 신발도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울퉁불퉁했던 삶도 어느덧 즐겨신던 신발처럼 닳아 평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몸을 뉘어야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지, 언제 일어나야 몸이 편한 지 알게 되었고 주에 어느 정도 운동을 해야 몸이 개운한 지 깨달았습니다. 밥은 어떻게 챙겨 먹어야 하는 지,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에 대해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느정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혼돈과 질서
저번 회고에서는 제가 어떤 사람인 지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 삶을 바라봐야 하는 지 깊게 탐구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올해 꽤 많은 자격증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중요한 시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심을 다하지 않은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떨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큰 슬픔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격증 신청 기간이 오면 신청하고 떨어지고를 꽤나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어느 순간에는 시험에 불합격을 통보받아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일본어 자격증 시험이었는데, 개발자에게 있어 굳이 있으나 마나 한 자격증이었기 때문일까요? 그 순간 ' 내가 원하는 건 뭘까? '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습니다. 진심으로 내가 이 자격증을 원했더라면, 실패에 대해서 분하고 슬퍼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잃었을 때는 슬프고 분합니다. 이 명제가 참이라면, 이 명제의 대우도 참입니다. 분하지 않고 슬프지 않다는 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크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질서로운 삶?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삶도 좋습니다만, 이는 진정으로 저를 분하게 할 만큼 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앎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공부하고 싶고, 세상 일이 내가 알지 못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했다고 생각했던 질서로운 삶은 그저 목적이었고, 질서 잡힌 삶을 위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수단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수단인 세상을 알아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나태주
앎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앎이란 것은 질서와 대립합니다. 안다는 것은 세상에 부딪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모험입니다. 즉 앎은 질서와 반대에 있는 혼돈입니다. 질서를 위해 혼돈을 받아들여야 한다니... 이내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혼돈이 있어야 질서가 있을 수 있었고, 질서가 있어야 혼돈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가 저를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모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년시절, 학창시절, 그리고 대학시절. 그 모두가 여러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하나의 부(部)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매 부(部)가 진행되면서 질서와 혼돈이 반복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대학시절이라는 부가 마무리되어 갑니다. 다양한 질서와 혼돈이 교차하는 챕터를 남겼고, 앞으로 다른 챕터에서도 많은 것들을 느끼겠죠. 무지함과 앎,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탄생과 죽음 그 수많은 것들이 챕터에 쓰일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연함이라는 마음입니다. 혼돈이라는 덩굴을 헤치며 나아가는 방법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앞으로 더욱 불거진 덩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 당신을 뵙노라고 바쁜 걸음을 내어 옛 거처에 들렸습니다.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늘어난 당신의 약을 보았습니다. 바쁜 일정을 보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머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떠나는 제게 무엇이라도 들려주려고 했던 당신을 생각하곤 합니다. 본가에 자주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귀담아듣지 않았던 제가 스스로 원망스러웠지만, 당신은 그런 인색한 제게 슬픈 낯빛 하나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제 소중한 사람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당신이 저를 떠나보냈을 때의 의연함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또한 항상 자리를 지키며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당신의 의연함... 어쩌면 당신은 바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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